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민수기 3:40-51


레위인의 중요성을 다시한번 강조하면서 신학적인 의미를 제시하고 있다.


그러나 오해하지 말 것은 그 '사람'이 중요해서가 아니라는 점이다.

레위인이 중요한 것은 그가 그리스도를 설명하는 ‘메시지’이기 때문이다.

레위인은 장자로 묘사되는 이스라엘 전체를 대신하고,

그들 '사회적 죽음'과 '속전'을 통해 그리스도의 구원을 나타내고 있는 것이 아닌가!!


성도가 거룩한 이유도 마찬가지다

우리가 거룩하기 때문이 아니라, 하나님께서 우리를 당신의 메시지로 구별했기 때문에 거룩한 백성인 것처럼 말이다.


그러므로 우리는 우리의 삶을 통해 하나님의 메시지, 예수그리스도의 구원을 세상에 전하는 편지여야만 하는 것이다.


41절에서 45절의 구조는

“나는 여호와라 레위는 내것이다”는 말씀을 앞뒤로 해서 레위인을 담으셨다.

물론 레위지파만 하나님의 것이라는 말이 아니다.

레위인을 따로 구별 하셨다는 의미이다.

특별한 목적을 가진 자로…


한 걸음 더 나아가서

하나님은 레위인(존재) 뿐 아니라, 그가 가진 모든 소유(삶의 방식)도 하나님의 것으로 구별하셨다.


이렇게 존재와 삶의 방식을 선택받은 삶은 성경의 관점에서 분명히 축복이다.

그래서 우리는 하나님의 소유로써 삶을 살아야 할 책임과 의무가 있고,

삶의 방식에서 그것이 드러나야 한다.


레위인은 신약의 관점으로 보면, 그리스도를 믿는 성도들 전체를 의미한다.(벧전2:9)

우리 역시 우리의 의지와 상관 없이 거룩한 백성으로 선택을 받았기 때문이다.

우리는 그것을 “은혜”라고 부른다.

그리고 우리 스스로를 성도, 거룩한 백성으로 부른다.


이것이 당연한 기독교의 가치며 축복이다…!!


그러나 오늘날은 사람들은

자신의 의지와 선택이 반영되지 않은 상황을 매우 불편해 하는 경향이 있다.

축복이 아니라, 속박이며 저주라고까지 말한다.


사람의 가능성에 대한 긍정이,

하나님이 주시는 은혜에 대한 폄하로 이어지고 있는 거다.


인간의 의지와 도전 정신은 이제 하나의 종교처럼 작용하고 있고,

그것이 거저주시는 은혜를 무가치 한 것으로 밀어내고 있는 현실을 직면하고 있다..

이젠 더이상 은혜가 은혜가 아닌 것이다.


감동도 없고, 감사도 없다..


인간의 노력으로 14좌의 높은 산에 오른 인간의 불굴의 의지에 비하면

하나님의 은혜는 초라하기 그지 없다…


그러나 잊지 말자!!


우리편에서 구원은 너무나 쉽게 다가 왔지만,

결코 값싸게 온 것은 아니라는 것이다.


하나님의 아들의 핏값이라는 대가를 치르고서 얻은 구원이니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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