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예레미야 41:1-18

내용: 예루살렘이 점령당한 뒤에 바벨론은 그다랴를 유다총독으로 임명합니다. 그러나 3개월만에 이스마엘에게 암살을 당하고 또 다시 유다는 혼란에 빠지고 맙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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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일곱째 달에 왕의 종친 엘리사마의 손자요 느다냐의 아들로서 왕의 장관인 이스마엘이 열 사람과 함께 미스바로 가서 아히감의 아들 그다랴에게 이르러 미스바에서 함께 떡을 먹다가 2.느다냐의 아들 이스마엘과 그와 함께 있던 열 사람이 일어나서 바벨론의 왕의 그 땅을 위임했던 사반의 손자 아히감의 아들 그다랴를 칼로 쳐죽였고 3.이스마엘이 또 미스바에서 그다랴와 함께 있던 모든 유다 사람과 거기에 있는 갈대아 군사를 죽였더라 4.그가 그다랴를 죽인 지 이틀이 되었어도 이를 아는 사람이 없었더라 5.그 때에 사람 팔십 명이 자기들의 수염을 깎고 옷을 찢고 몸에 상처를 내고 손에 소제물과 유향을 가지고 세겜과 실로와 사마리아로부터 와서 여호와의 성전으로 나아가려 한지라 6.느다냐의 아들 이스마엘이 그들을 영접하러 미스바에서 나와 울면서 가다가 그들을 만나 아히감의 아들 그다랴에게로 가자 하더라 7.그들이 성읍 중앙에 이를 때에 느다냐의 아들 이스마엘이 자기와 함께 있던 사람들과 더불어 그들을 죽여 구덩이 가운데에 던지니라 8.그 중의 열 사람은 이스마엘에게 이르기를 우리가 밀과 보리와 기름과 꿀을 밭에 감추었으니 우리를 죽이지 말라 하니 그가 그치고 그들을 그의 형제와 마찬가지로 죽이지 아니하였더라 9.이스마엘이 그다랴에게 속한 사람들을 죽이고 그 시체를 던진 구덩이는 아사 왕이 이스라엘의 바아사 왕을 두려워하여 팠던 것이라 느다냐의 아들 이스마엘이 그가 쳐죽인 사람들의 시체를 거기에 채우고 10.미스바에 남아 있는 왕의 딸들과 모든 백성 곧 사령관 느부사라단이 아히감의 아들 그다랴에게 위임하였던 바 미스바에 남아 있는 모든 백성을 이스마엘이 사로잡되 곧 느다냐의 아들 이스마엘이 그들을 사로잡고 암몬 자손에게로 가려고 떠나니라 11.가레아의 아들 요하난과 그와 함께 있는 모든 군 지휘관이 느다냐의 아들 이스마엘이 행한 모든 악을 듣고 12.모든 사람을 데리고 느다냐의 아들 이스마엘과 싸우러 가다가 기브온 큰 물 가에서 그를 만나매 13.이스마엘과 함께 있던 모든 백성이 가레아의 아들 요하난과 그와 함께 있던 모든 군 지휘관을 보고 기뻐한지라 14.이에 미스바에서 이스마엘이 사로잡은 그 모든 백성이 돌이켜 가레아의 아들 요하난에게로 돌아가니 15.느다냐의 아들 이스마엘이 여덟 사람과 함께 요하난을 피하여 암몬 자손에게로 가니라 16.가레아의 아들 요하난과 그와 함께 있던 모든 군 지휘관이 느다냐의 아들 이스마엘이 아히감의 아들 그다랴를 죽이고 미스바에서 잡아간 모든 남은 백성 곧 군사와 여자와 유아와 내시를 기브온에서 빼앗아 가지고 돌아와서 17.애굽으로 가려고 떠나 베들레헴 근처에 있는 게롯김함에 머물렀으니 18.이는 느다냐의 아들 이스마엘이 바벨론의 왕이 그 땅을 위임한 아히감의 아들 그다랴를 죽였으므로 그들이 갈대아 사람을 두려워함이었더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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오늘 본문에 등장하는 세 사람이 있습니다. 유다 총독, 그다랴, 왕족 이스마엘, 군 사령관 요하난....

저마다 자기의 생각과 뜻에 따라 서로 반목하고 대적하고 죽이는 모습을 봅니다.

애국충정의 정서를 가지고 본다면 나라의 독립을 위해 일어난 이스마엘은 유다사회에서 존경받아야할 영웅이 아닐까요? 그다랴는 하나님의 뜻이라는 생각, 요하난은 정의에 불타고....

우리는 사람들의 선택을 두고 어떤 것이, 도 누가 옳았나 판단하려는 성향들이 있습니다. 오늘 본문에서도 이스마엘이 잘한거냐? 아니면 그다랴가 하나님의 뜻을 따라 행한거냐? 요하난은 이도저도 아니고 도대체 뭐냐? “무엇이 옳습니까?”

지금 우리가 살고 있는 이 시대의 반목과 분열을 한번 생각해 보십시오. 또 이 땅의 교회들마다 분열하고 다투는 것이 어디에서 오는 것입니까?

우리가 ‘하나님 뜻은 이것이다!’라고 붙잡고 있는 것에서, 옳다고 생각하는 것에서 비롯되는 것 아닙니까?

우리 가정의 불화도 마찬가지입니다. 싸움은 내가 옳다고 생각하는 것을 상대방에게 강요할 때 시작됩니다.

무엇이 정답입니까?

다양한 생각, 다양한 상황 속에서 우리는 무엇을 답으로 붙들어야 할까요?

하나님만이 정답인줄로 믿습니다.

바벨론 포로, 우리의 정서로는 도저히 이해 할 수 없는 것입니다. 그러나 그 불편한 생각도 하나님의 계획안으로 들어가면 선한 것입니다.

이처럼 우리가 우리의 역사와 세상을 바라보는 기준은 분명 하나님입니다~! 그러나 문제는 하나님의 뜻이 어디에 있는지 분별하는 것이 쉽지 않다는데 있습니다.

우리 눈에 좋은 것이 좋은 것일까요?

‘하나님 나라는 이래야 한다. 메시야는 이런 일을 하신다.’라는 생각을 붙드는 한 하나님의 뜻을 발견하기 어려울 것입니다. 민족이 압제에서 벗어나는 것, 이것이 사람의 지대한 관심일 수는 있으나,

하나님께도 꼭 그래야 한다는 법은 없습니다. 이스마엘의 관심에 우리 하나님이 꼭 매여야 하는 것은 아닙니다. 그래서 결국 이스마엘은 살인과 도망으로 종결되어지는 인생을 살았습니다.

요하난도 하나님의 뜻에서는 멀리 있기는 마찬가지 였습니다. 그는 이스마엘에게서 백성들을 구출 해 오기는 했지만 오히려 그들을 애굽이라는 난파선에 태워 파선시키는 악역을 행하였던 것입니다. 우리는 예레미야서를 보며 하나님의 뜻이 어디 있음을 배웠습니까? 그저 국가의 형태를 유지하는 것이 하나님의 뜻이었습니까? 안의 내용물은 썩어가든 말든 독립이라는 형태만 유지하는 것이 다가 아니었습니다. 또 그것을 위해 애굽이라는 세상의 힘에 기대는 것도 아니었습니다.

하나님의 뜻은 ‘회복’에 있었습니다.

하나님은 사람을 회복하시기 위해 일하십니다. 그것이 인간의 상식, 지식, 이성을 뛰어 넘을 수 있음을 늘 염두 해 두어야 합니다. 그것이 겸손입니다.

예수 그리스도의 십자가는 사람들에게 미련하고 허무한 것이었지만, 하나님의 지혜였습니다. 하나님의 공의와 사랑을 완전히 만족시키신 하나님의 지혜였습니다.

그 지혜는 결국 사람들의 회복을 위해 사용하셨다는 것을 잊으시면 안되겠습니다.

하나님의 뜻은 결코 획일적이지 않습니다. 상황과 시대적 배경은 유사하다 할지라도 하나님은 과거와 늘 동일한 모습으로 오시지 않습니다. 그러나 분명한 것은 하나님의 일하심의 동기는 언제나 사람의 회복입니다.

그렇다면, 우리에게 필요한 것이 무엇입니까? 그동안 내가 신앙생활하면서 굳어진 하나님에 대한 허상을 매일 매일 깨드려 나가는 것입니다. 그리고 잃어 버렸던 하나님의 형상을 말씀 앞에서 회복하는 것입니다. 날마다 아침마다 기도하실 때, 하나님의 뜻이 무엇인지 겸손히 구합시다. 또 내가 오늘 하나님의 형상으로 회복 되어야 할 것이 있다면 무엇인지 하나님께 구하십시다! 그것이 때로는 어리석게 보이고, 시대감각에 뒤떨어져 보이고, 때로는 좌파라고, 혹은 수구적이라고 오해받는 일이 있다할지라도 묵묵히 하나님의 마음을 전하고 행해가야 할 것입니다.

그리할 때 우리 가정에, 사회에, 교회에, 그리고 이 민족에 진정한 회복이 올 것입니다.

오늘도 하나님의 뜻을 구하는 겸손함으로 하루를 시작하시길 축원합니다.

샬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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