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사도행전 19:21-41

내용: 세력을 얻게 된 복음으로 인해, 우상 장사치들은 적지 않은 손해를 입습니다. 그로 인하여 그들은 바울 일행을 고발하려고 소요를 일으키고 있습니다.

복음을 전하는 일로 인해 바울 일행은 오해받고, 모함을 받아 구석으로 몰리 게 되었습니다.

이것을 ‘변명’하려 하지만, 에베소 시민들이 듣지도 않고 자기가 떠들 말들만 외치고 있습니다. (34)

재미있는 것은 ‘태반이나 왜 모였는지’ 알지도 못하면서! 대모를 하고 있는 것입니다. (32)

그럼에도 불구하고 바울 일행을 처벌 할 수 없었던 것은,

윤리적으로나 도덕적으로나 무슨 덕으로든지 책잡을 만한 삶을, 행동을 찾지 못했기 때문입니다.

35-41절의 내용이 그 결과입니다.

하나님은 그래서 바울 일행을 통해 구차히 ‘변명’하게 하지 않으시고,

오히려 세상이 대변하도록 섭리해 주시고 있는 겁니다.(35-41)

! 여러분, 복음을 더욱 힘있게 하는 것은 그것을 뒷받침해주는 신자들의 흠없는 삶이었습니다~!!

오늘날 많은 사람들이 기독교를 비판하고 거부합니다.

그러나 복음 때문에 거부 당하고 비판 받는다기 보다는

‘흠’이 많은 신자들의 ‘모순된 삶’ 때문일 것입니다.

! 오늘 본문에서 인상 깊은 것은

반대하는 목소리와 죽이려고 달려드는 무리들,

오해하고, 왜곡된 말들로 복음을 위협하여 신자들을 구석으로 몰고 있는 이 상황에서….

너무나 이상하리만치…..

바울과 그 일행의 모습과 행보는 조용하기만 합니다……!!

-적극적으로 변명하기 위하여, 힘있는 사람들의 ‘빽’을 이용하거나, 로비와 인맥을 통해서 복음을 위협하는 저 무리들과 맞서 싸워야 하는데, 그들은 그렇게 하지 않습니다.

-하나님께 기도하며 그 무리들 안에서 역사하는 사탄의 권세를 예수의 이름으로 쳐 부숴 달라고 간절히 구해야 하는데, 그렇게 하지 않습니다.

=왠지 모를 ‘당당함’이 오늘 본문 행간에서 흐르고 있는 것입니다.

오해하고 모함을 하는 이 마당에 분노를 품고 ‘적극적’으로 대결 하지 않고, ‘소극적’으로 ‘어디 해볼테면 해봐라’는 식으로 진술되는 이 ‘여유’는 무엇일까요?

=아마도 덕있는 삶이 아니었겠습니까?

그들은 한사람이라도 이 복음으로 구원 하고자 흠잡힐 만한 행동을 하지 않았습니다.

유대인들 앞에서는 유대인들에게 책잡히지 않는 말과 행동으로

헬라인들 앞에서는 헬라인들의 경우에 합당한 말과 행동으로

복음이 그들에게 전해지는데에 있어서 자기 자신의 말과 행동이 걸림이 되지 않도록

덕있는 삶을 산 것입니다.

-고전8장에보면 우상의 제물을 먹는 문제가 나옵니다.

그리스도를 믿는 신자들에게 있어서 그것은 거리낌이 없는 것입니다.

그러나 사도바울은 강력하게 말합니다. (고전8:31)

“그러므로 만일 음식이 내 형제를 실족하게 한다면 나는 영원히 고기를 먹지 아니하여 내 형제를 실족하지 않게 하리라”

이것이 초대 교회 신자의 ‘당당함’이며, ‘여유’가 아닌가 싶습니다.

=저는 성도들의 먹는 문제로 실족하지 않습니다~!

술을 먹거나 담배를 피우는 것을 신앙에 연결 짓지도 않습니다.

그러나 저는 건강을 위해 그런 음식을 먹지 않을 것입니다.

그 누구라도 실족하게 할수 있기에, 저는 저의 먹는 권리를 내려놓을 것입니다!

영원히 고기 안먹겠다는 바울의 결단처럼,

다른 사람들을 위해 내 행동을 ‘제한’겠습니다.

오직 하나님의 의만 드러나도록 나 자신을 쳐서 복종하겠습니다.

신자들에게 있어서 오늘이라는 시간은…..

이런 의미에서 나를 위한 시간이 아니라, 타인을 위한 시간, 이웃을 위한 시간이 아닌가 싶습니다.

부디 그들을 부르시는 하나님의 마음을 백분 이해하여

그들 앞에 흠없는 삶을 살수 있도록 기도하며 하루를 시작하시면 좋겠습니다.

오늘도 평안하세요~!

샬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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