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애국] 이한결
愛 國
[애 국]
이 한 결
안중근의사 순국 108주기 추모
제16회 전국 학생 글짓기 대회
‘탕탕탕탕’
1909년 10월 26일, 하얼빈의 차가운 아침공기를 가르며 십자탄두 총알 4알은 정확히 우리 조국의 원수에게 꽂혔고 그 자리에서 즉사했다.
순식간에 하얼빈은 아수라장이 되었고, 권총의 주인은“코레아 우라”즉, 대한민국 만세를 외치며 태극기를 펼쳤다.
그의 태산보다 큰 애국심은 그의 올바른 정치 신념이 되었고 마지막 죽는 순간까지도 흔들리지 않았던 진정한 한국인 그의 이름은 ‘안중근’ 이다.
“응애! 응애!”1879년 가을 황해도 해주.
갓 태어난 아기의 울음소리는 황해도 해주에서 한양까지 울려 퍼져 나갈 것처럼 우렁찼다. 안중근의 본래 본명은‘안응철’이였다. 그는 활발하고 통솔력과 호기심이 많은 아이였다.
그는 감옥에 갇혀 사형을 당하기까지 수감생활을 했다. 한 달 동안 많은 간수들이 안중근이 쓴 글을 갖고 싶어 했으며 200건 이상의 글을 써서 나누어주었다.
이는 대청마루에 앉아 글을 써서 뛰어노는 안응칠의 시선을 빼았고 글에 흥미를 보이게 한 할아버지 안인수의 가르침이 컸다.
아버지 안태훈은 18살에 진사로 되어 신동이라 불리었고 어머니 조마리아 역시 안중근의 사형판결을 듣고도 “항소하면 일제에게 목숨을 구걸하는 꼴이니 하지 말고 죽음을 받아들여라”라고 할 정도로 기개 있는 여인이었다.
범 같은 집안에 어찌 개와 같은 자식이 나오랴? 안중근은 범이 될 수 밖에 없었다고 여겨진다.
1884년 황해도 해주에서 갑신정변 때문에 청계동으로 이사를 갔다. 그곳은 산이 많아 사냥꾼들이 많았다. 그 영향으로 안응칠은 백발백중의 사격실력을 가지게 되었다.
안중근은 그 뿐 아니라 책 읽는 것을 무척이나 좋아하였다,
그는 ‘안응칠 역사’, ‘동양평화론’책을 저술할 정도의 실력과 학식도 책에서 만들어 나갔다. 그는 아주 유명한 말을 남겼다.
‘일일불독서 구중생형극’으로 하루라도 책을 읽지 않으면 입안에 가시가 돋는다라고 이야기 한다. 그만큼 책을 좋아했다.
나라는 점점 혼란스러워 지고 있었다.
신부 9명의 죽음을 명분으로 프랑스가 침략한 1866년 병인양요와 제너럴 셔먼호를 명분으로 미국이 침략한 1877년 신미양요, 개화파의 1884년 12.4일 3일천하 갑신정변이 일어났다.
1894년 조선에서 동학 농민 운동이 일어났다. 농민군처럼 위장하여 나쁜 짓을 일삼는 무리를 마을 사람들과 안중근이 힘을 합쳐 몰아냈다.
1904년~1905년 러일전쟁이 일본의 승리로 끝나던 해 일본의 영웅, 한국의 원수인 이토 히로부미가 결국 한반도에 큰일을 벌이게 된다.
군대로 궁을 포위하여 대신들에게 실질적인 협박을 하였다. 또한 그는 한국 외교를 박탈하기 위한 조약인 을사조약을 강제로 체결했다. 이에 고종은 찬성하지 않았으나 5명의 대신이 찬성함으로 우리나라는 핍박을 받기 시작하였다.
이토는 조선 총독부가 세워지기 이전에 한국 황실의 안녕과 평화를 유지한다는 명분으로 통감부 내세웠다. 그리고 자신이 초대 통감이 되었다.
분노한 안중근은 한국을 떠나 일본의 감시가 없는 곳인 중국 산동과 상해로 갔다. 중국 산동에서 같이 대책을 세우자고 조선 동포들에게 외쳤지만 아무도 안중근의 말에 귀를 기울이지 않았다.
우연히 자기 스승 르각 신부를 만나서 조언을 들었다. 교육의 발달, 사회의 확장, 민심의 단합, 실력의 양성 등 4가지를 안중근에게 말해주었다.
‘아 나라가 힘을 길러야 사는구나’
그는 고국으로와 평안남도 진남포에 삼흥학교를 세워 젊은이들에게 독립정신을 심어주려 노력했다.
1907년 2월에 대구에서 시작된 국채 보상운동에 안중근은 참여하자는 홍보에 힘썼다. 나라의 빚을 갚자는 의미에서 시작된 운동은 전국으로 확산되었다. 엄청난 운동이 일어난 것이다.
1907년에 고종이 헤이그로 특사를 보냈지만 일본의 방해로 참석하지 못했다.
그로인해 고종은 폐위 당했다.
또한 우리나라 군대를 없애자 또 한 번 분노한 안중근은 블라디보스토크로 가서 대한의군을 만들었다. 여러 지역에서 승승장구 하던 대한의군은 함경도 화령전투에서 기습을 받아 크게 지고 말았다. 안중근은 함경도에서 다시 블라디보스토크로 몸을 피했다.
1909년 봄 단지회에서 손가락을 자르고 조국의 원수를 물리치자는 약속을 하였다. 그해 10월 26일 아침특별 열차로 이토 히로부미가 이 역을 지난다는 이야기를 들었다. 그곳은 전 대한의군 동지, 우덕순이 기다렸고 안중근은 하얼빈으로 가서 이토를 기다렸다.
우덕순은 총을 소지한 것을 들켜 실패했다. 우덕순이 실패한 걸 알게 된 안중근의 어깨는 무거워져만 갔다. 오전 9시 30분 하얼빈 역 1번 게이트에서 총알 4발을 이토 히로부미에게 쏘았고 태극기를 흔들었다. 안중근은 뤼순 감옥에 투옥되었지만 꿋꿋하고 강직하게 자신의 신념대로 말하였다. 그로 인해 안중근을 따르는 자가 많아졌다.
그를 따르는 자가 많아져서 도리어 공격을 할까봐, 두려운 일본 재판부는 사형을 내린다.
1910년 3.26 아침. 어머니가 지으신 흰 명주옷을 입고 32세 젊은 나이로 생을 마치게 된다.
안중근은 젋은 나이게 생을 마쳤지만 그의 죽음은 전 세계에 알려졌고 민족의 자존심을 알리고 일본의 만행을 알게 했다. 일본은 문을 굳게 닫아 자신들의 만행을 알지 못하게 잠갔다. 하지만 안중근의 업적으로 인하여 세계가 봤던 것이다! 이런 업적은 모두 애국심에서 비롯되었다.
용기, 자신감, 끈기 이 3가지는 안중근에게서 배울 수 있는 점이다.
먼저 첫 번째는‘용기이다. 용기는 안중근 의사의 친구이다. 안중근은 참으로 대단히 용감한 사람이다. 우리 동포는 참으로 위대한 민족이다. 용기는 그의 업적에서 더욱 빛을 바라게 했다. 108년 전 하얼빈 역에는 일본 헌병. 그리고 러시아 헌병까지 많은 군인들이 있었다. 그러나 안중근은 그것에 기죽지 않고 끝까지 자신의 계획을 실현하였다. 자신의 목숨을 바쳐 나라를 살리려고 했던 그의 용기는 위대한 마음에서 비롯되었다.
두 번째는 ‘자신감’이다. 일본인 판사 앞에서 두려워하지 않은 자신감은 안중근의 책을 볼 때마다 날 흐믓하게 만드는 이유이다.
논리적이고 자신감 있는 표현으로 이토 히로부미의 15개 죄목을 조목조목 말하며 일본인의 법정에서 기 죽지 않은 모습을 보였다.
나도 책을 많이 읽어 지식을 쌓아서 누구 앞에서든 자신감 있게 말하고 표현하고 싶다. 또한 한 번 더 생각하고 이야기하는 안중근의 모습은 정말 나의 가슴을 뛰게 한다,
마지막으로는 ‘끈기’이다. 다르게 표현하자면 추진력이다. 그는 이토가 거짓 전보를 치지 않았을까 생각하며 신문을 종류별로 사서 이토의 소식을 알아내려 하였다. 또 그는 이토에게 총을 쏘고도 이토가 아닐까봐 옆에 장교에게도 쐈다. 약지를 끈은 단지회 맹약처럼 자신이 옳다고 여기면 그대로 밀고 들어갔다. 대단한 추진력을 보인 안중근의 별명은‘번개입’이였다. 번개처럼 가리지 않고 옳지 않을 상황에는 나서서 자신의 소견을 말하는 안중근에겐 알맞은 별명 이였다. 한양의 관리가 부당하게 재물을 착취하자 청계등에서 한양의 관리를 찾아 간다. 그 관리에게 따지며 재물을 돌려주겠다는 각서를 받아내기도 했다.
그의 신중함도 우리가 배울 점이다.. 용기, 자신감, 끈기 이 모두 신중함과 환상의 조합을 이룬다. 신중함은 안중근의 주장에 믿음을 가지게 해준다.
일본은 동아시아를 침략했다. 제국주의로 인해 중국, 러시아 등에서 영향력을 펼쳤다. 러시아, 중국 등보다 동아시아에서 제일 작은 나라, 한국의 안중근이 일본의 세력에 투쟁하고 결정적 역할을 담당하였다.
끝까지 믿고 당차게 헤쳐나간 안중근!!!
이 시대는 많은 문제들이 있는데 안중근 같은 인물과 같이 용기와 자신감, 끈기를 가지고 신중하게 행동한다면 어려운 문제들을 잘 극복해 나갈 것이다.
내가 그런 인물이 되고 싶다.
안중근의 4발의 총탄은 동아시아에 대한 일본의 야욕을 전 세계에 알리는 신호탄이 되었다.
용기, 자신감, 끈기는 모두 그가 나라를 사랑하는 애국심에서 비롯되었다고 본다.
이토 히로부미는 에도시대라 불리는 1841년 10.16일부터 일본의 메이지 시대인 1909년 10.26까지 삶을 살았다. 하야시 주도와 고토고 사이에 태어났다. 일본의 제국과 식산흥업을 통한 부국강변을 실현하도록 노력한 인물이다. 즉 생산을 늘리고 산업을 일으켜 나라의 경제를 넉넉히 하고 군사력을 튼튼히 만들려는 일본의 애국자라고 볼 수 있다. 그러나 그 방법은 다른 나라를 빼앗는 방법을 택하였다.
안중근은 나라가 착취당하는 일에 분개하였고 그 일을 내버려 두지 않았다.
안중근의 업적은 우리 정신을 다시 한 번 일깨웠고 대한민국 뿐 아니라 전 세계를 일깨우는 알람시계 역할을 담당한 것이다.
안중근은 죽지 않았다. 그는 죽지 않는다, 죽지 않을 것이다.
우리 민족은 죽지 않았다. 우리는 죽지 않는다, 죽지 않을 것이다.
아무리 탄압을 하여도 이런 정신들은, 신념들을 죽일 수 없다.
그의 정신은 우리 가슴에서 활활 타오르게 한다.
안중근은 108년 전에 삶을 마쳤어도 그의 나라사랑 하는 마음은 우리들의 가슴에 영원히 살아남아 있다.
선조들이 목숨 바쳐 깊게 박은 지지대에 있는 대한민국이라는 나무는
강풍이 몰아치고 바다가 휩쓸어도
흔들릴 수는 있어도, 절대 쓰러지지 않는다.
어려움이 있어도 다시 이겨낸다.
그것이‘대한민국’이라는 나라이다.
우리의 5000년 역사가 증명하고 있다.
대한민국은 여전히 빛나고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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